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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아아 명절

이번 추석을 지내면서 시부모님에 대해 느낀점



좋으신 분들이다.


그러니까 내가 가면 전만 부칠 수 있도록 밑작업은 미리 다 해 놓으신다. 사실 그 준비 작업이 시간도 훨씬 오래 걸리고 힘들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감사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전 다 부치고 저녁엔 영화도 보러 갔다오라고 해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물 무칠 것이 있었는데 나한텐 말 안 하시고 마음 편히 보러 다녀오라고 보내주셨으니 정말 감사하다.

벌초하러 가서 나는 힘드니까 차례 지낼 준비가 될 때까지 밑에서 기다리라고 하시고 어머님/아버님/도련님/chan 넷은 모두 사람 키만한 잡초들 헤치며 올라가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의 요소.


1. 남자와 여자에 대한 역할 구분


나한테 잘 해주시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나, 기본적인 남자와 여자의 명절 일에 대한 마음이 다르다. 예를 들어, 내가 chan이랑 전 부치려고 자리 잡고 있는데 도련님한테 어머님이 하시는 말씀, 


"아들, 아들은 나가서 좀 놀다 와." 

 

이 얘긴 사실 지난 설에도 들었었다. 그 때 사실 더 정확히 하셨던 말은, "올해는 일할 사람이 있으니까~호호호"


일할 사람

일할 사람

일할 사람


나는 일할 사람.


그리고 올해 추석 전 날 밤 잠자리 들기 전.


"어머님, 내일은 몇 시쯤 일어나야 할까요?"

"남자들은 7시, 여자들은 6시 정도엔 일어나야할 거 같은데?"

"아..6시요?"


참고로 이번 명절엔 친척들이 아무도 오지 않아서 여기서 '여자'라 함은 나랑 어머님 둘.


나도 모르는 사람들 차례를 지내는데, 이 집 남자 3명은 준비 안 하고 나랑 어머님이랑 새벽같이 일어나서 준비를...


화병나서 새벽까지 chan한테 화내고 잠도 잘 못잤다.


2. 제사에 대한 믿음


나는 제사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다.

제사 지낼 때 죽은 조상님이 와서 차려놓은 음식을 먹고 간다거나, 절하면서 우리 잘 되게 비는 그런 마음. 전혀 믿지 않는다. 


근데 시부모님들은 그걸 좀 진심으로 믿으시는 것 같다.

그냥 오랫동안 해오던 걸 안 하는 건 좀 그러니까 간단하게라도 하자-하는 마음이 아니라(이건 우리 친정 부모님 생각), 정말로 그 정신을 조금 믿으시니까 이런저런 일들이 생략이 잘 안 된다.


내 친정 부모님은 '제사 따위, 살아있는 사람들이 훨씬 중요한거지.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야.' 라는 마인드였다. 그래서 명절이나 제사 때도 최소한으로 하려고 노력했고, 제사 보다는 가족들이 모인다는 거에 더 의의를 두었었다. 이런 곳에서 살다가 지금 시부모님을 만나니까 '도대체 이게 뭐야?' 싶은거지. 한편으로는 이해도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근데 그렇다고 왜 내가 고생해야하지? 난 이게 너무 싫은데?'


그리고 요즘엔 다 설날이든 추석이든 당일 오후에는 친정집으로 가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 추석 때 벌초하고 저녁에 기차타고 간다니까, 이번 연휴가 이렇게 긴데 벌써 가냐고 섭섭해 하심. 내 친정 부모님이 나 못 봐서 섭섭해하실 껀 별로 생각 안 하심.


3. 벌초


나는 결혼 전에는 '벌초'라는 걸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근데 chan네 집은 매년 추석 때마다 벌초를 다녀왔단다. 추석 당일날 아침 일찍 차례 지내고 밥 먹고 출발해서 벌초하고 그 근처 계곡가에서 또 고기 궈 먹고 돌아왔단다. 그럼 나는 추석 당일에 밤 늦게야 친정집에 갈 수 있는거다. 너무 늦어져서 거의 못 간다고 봐야지.


게다가 이번에는 더 싫었던 게, 

엄마가 


"너네도 벌초 간다고 했지? 올해도 가는거야? 너도 가야한데? 아니...근데 요즘 매주 뉴스에서 벌초 갔다가 벌에 쏘여 죽은 사람들이 하도 나와서...그게 좀 걱정스러운데.."


이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서러워졌다. 그리고 그 벌초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우리집 조상님 벌초도 한 번도 안 했는데 나 먹고 사는데 10원 한 장 도움준 적 없는 얼굴도 모르는(심지어 아버님 어머님도 얼굴 모르는) chan의 고조 할아버지 할머니(그렇다, 무려 고조!)를 위해 목숨 걸고 가야하며 그거 때문에 추석 당일 날 친정집도 못 가서 지금 살아있는 내 가족도 못 봐야 하는거지? 하는 마음.


게다가 나는 원래 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4살 때 산에 갔다가 벌에 쏘인 후로는 작은 꿀벌 한 마리만 봐도 완전히 경직되고 심장이 미친듯이 빠르게 뛴다.


chan이 어머님한테 요즘 벌초갔다가 죽은 사람들 많다고, 그게 그렇게 해야할 일이냐며, 장모님도 좀 걱정하신다라고 하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벌초를 못 가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일축. 그러면서 예전 chan의 할머니 할아버지도 벌초하시다 벌집을 잘못 건드려 크게 다칠 뻔 하셨는데 겨우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를 재미있는 이야기 하시듯...하아..

이거 마치 심하게 야근하고 깜빡 졸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기절했던 거였다는 얘기를 재밌는 이야기 하듯 하는-것과 비슷한 정서같아 짜증이 확. 나는 진짜 이런 끔찍한 이야기의 어디에서 재미를 찾아야할 지 모르겠다. 


결국 벌초 갔다가 주먹만한 벌 보고 나 완전 경끼 일으켰다가 놀라고 서럽고 분하고 화나서 울고.

이 때 완전히 폭발해서 chan한테 이혼하자고, 너랑 결혼하고 나만 ㅈㄴ 개고생하고 이게 뭐냐고. 


오는 길 내내 온 몸이 쑤시고 아픈 게 너무 서럽고 화가 풀리지 않아서 말 한 마디 안 하고 왔다.

 

4. 내 성격


극소수의 친한 사람들은 알고 있는 내 그지같은 성격. 화가 나면 정말로 상처가 되는 말을 잘한다. 그 사람에게 어떤 말이 정말 큰 상처가 될 말인지를 나는 너무 잘 안다. 그리고 비아냥도 수준급. 아, 근데 여기서는 그것 보다는. 나는 내가 납득이 안 가면 정말로 그 일을 하는 걸 힘들어한다. 계속 '아니 왜? 왜지? 왜? 도대체 왜?'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고 들면서 화가 나고 이건 내 몸이 힘은 일일수록 더 심하다.


내 믿음과 다르더라도, 납득하지 못하는 일이라도, 다른 사람 입장(지금의 경우는 시부모님 입장)에서 '에이, 그래, 저분들이 이제와서 바뀔 것도 아니고, 내가 며느리니까 맞춰드려야지.' 하는 마음이 들지를 않는다. 아니, 쪼금은 들지. 그러니까 웃으면서 전도 부치고 하지. 근데 내 마음 속에서는 '며느리가 죄인이야? 요즘 세상에 어떤 세상인데?' 하는 마음을 지우지 못한다는 거지.


기왕 해야 하는 거 좀 좋게좋게 생각하면 나한테도 더 좋을 것을, 그걸 정말 못하는 더러운 성격.

시댁 내려가기 전 날부터 침대에 누워 '우리나라 명절은 왜 이래야만 하는가?'에 대한 심도 깊은, 이 날 밤에 쓰면 논문도 한 편 낼 것 같은 생각을 끊임없이 하는 나도 진짜 더럽게 집요한 성격.  



명절,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보내야 한다면 솔직히 난 그냥 끔찍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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