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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지적 허영심 취향의 변화




예전에는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너머에 반드시 있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있었고 그걸 설명하려는 이론에 마음을 빼앗겼었다. 예외를 가장 적게 하나의 이론으로 가장 많은 것을 설명하는 가장 경제적인 이론이라는 것에 마음 설렜었고 하나의 개념이 여러 분야를 아울러 넓은 뜻으로 하지만 일맥상통하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멋졌다. 뜬구름 잡는 얘기도 좋아했고, 논리적으로 치열하게 집중해서 생각하고 그렇게 이론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물론 그만큼 고통도 수반되었지만. 내 능력을 떠나서 내 취향은 그랬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만들었던 김감독과 그 친구들과 학교 앞 허름한 골목길의 술집에 앉아 술취에 언젠가는 우리가 피스타치오과를 만들자는 얘기를 했었고, 대학원 시절 잘 알지도 못하는 과학 철학 수업을 단순히 매력적이라는 이유로 들었다가 수업 쫓아가기 힘들어서 죽을뻔 했었다. 아직도 기억나는건 무슨 까마귀 얘기. 그냥 까마귀만 기억난다. 교수님이 강의실에서 테이블에 다리 올리고 담배 피우던 것도. 쉽게 읽히지 않아도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들고 끙끙거리면서 책 한 장을 넘기는데 며칠이 걸리기도 했고, 결국 다 읽지 못했다. 언어학을 하면서도 통계나 실험을 통한 결과를 보여주며 그걸로 도출할 수 있는 이론은 이것이다 하는 것 보다는 비슷한 주제의 다른 논문들과 비교하여 논리로서 펼치는 주장이 더 매력적이었다. 실용적인 사람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 탁상공론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내 눈에 이런 이론의 최전선은 현실 세계보다 훨씬 더 앞서 있었고 조금씩 시간이 지나며 점진적으로 이론이 퍼지고 일반적인 것이 되어가며 세상을 바꾼다고 믿었다. 이건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아직도 순수 학문은 동경하고 있지만 이제는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것도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명확하고 설명하기 쉽고. 또 과학 기술의 발전과 발맞추어 밝혀낼 수 있는 것들도 점점 많아질 테고. 뭔가 현실과 조금 더 가깝게 맞물려가며 함께 가는 느낌이다. 특히 최신 기술은 인간 뇌에 대한 연구를 실험을 통해 알아낼 수 있을만큼 발전했다. 예전엔 미지의 세계였던 뇌를 파해치는 거다. 이게 너무 매력적이라서 아주 잠깐이지만 cognitive science에서 뇌과학 쪽으로 석/박사 과정에 갈까하는 생각도 했었다. 지금은 돼지가 실험실에 들어가려면 학부부터 다시 시작해야할 거라고, 그리고 실험실 석/박사생들이 얼마나 노가다처럼 일하는지 알려주었기 때문에 가뿐히 접었지만. 대신 많은 사람들이 노가다로 얻은 결과물만, 즉 논문만 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결론. 그래서 몇 년만에 처음으로 언어학 논문을 찾아 읽는 중이다. Auditory Processing of Amplitude Envelope Rise Time in Adults Diagnosed With Developmental Dyslexia. 발달성 난독증(?)을 가진 성인들이 청각 처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글자를 잘 읽지는 못하는 것은 음운에 대한 인지가 결핍이 동반되는 것이 통상적인 현상인데 그럼 그 사람들의 듣기는 괜찮은지. 정상인과 다르다면 무엇이 다른지. 어떤 부분이 다른지. 같은 병을 가진 아이들과 성인들을 비교했을 때는 무엇이 다른지. 뭐 그런 내용이다. 아직까지 Aplitude Envelope Rise Time이 뭘 뜻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읽다보면 대충 감은 오는데 그래도 잘 모르겠다. 근데 그래도 1~2시간 정도는 재미있게 읽었다. 가끔 이렇게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는 거다.   


여튼 요지는 시간이 가면서 순수 학문에서 실험/통계가 더 재밌는 것 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것.


근데 순수 학문이 너무 어려워서 이제는 더이상 나혼자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옆 길로 빠진 것 같기도 하다.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괜찮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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