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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 좋지 않은 어린이날
chan은 학원에 갔고 나는 로엔과 집에 오전 내내 있었다. 로엔은 베란다 박스에서 햇빛을 받으며 나른한 표정으로 누워있다가 나를 보더니 냐앙 소리를 내며 옆에 와서 잠시 머무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이불 위에서 제대로 자고싶은 마음이 든 것 같다. 나는 가끔 로엔을 물끄러미 보면서 로엔이 가는 곳, 하는 행동을 보고 그 마음을 점치길 좋아한다. 그래봤자 대부분은 이런 거다.
아 더 편하고 싶어서? 지금도 누워있는데? 막 더 편해지고 싶었어? 근데 그러다 나 보니까 또 놀고싶어? 앞발로 슬쩍슬쩍? 아 이제 배고픈거 같아? 아니 방금 밥 먹었는데 다시 먹어야할 거 같아? 내가 이 소파에 있는 꼴이 보기 싫어? 놀아줘? 놀아달라고 그 끈 앞에 정자세로 앉은 거야? 아까까지 잤는데 이제 제대로 잘라고 밥 먹고 오는 거야? 아까는 대충 잤으니까?
이런 말을 하다보면 나와 chan은 웃음이 나는 걸 참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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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소에서 산 1000원짜리 바질은 아직도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는데(이 정도면 이미 망해도 한참 전에 망한듯) 어제 코스트코에 갔다가 벵갈고무나무를 사서 들고왔다. 꽤 큰 건데 겁도 없이 들고왔다. 아직까진 1-2주에 한 번씩(흙이 말라있는 걸 확인) 물을 듬뿍 주고, 햇빛을 좋아하니 베란다에 놓는 게 좋다는 정보만 있다. 6개월이라도 안 죽고 살아있으면 성공이다. ㅎㅎ
바질이 싹을 틔우든 아니든 이미 식물에 대한 애정이 작지만 분명하게 자리를 잡았나보다. 바질은 씨앗을 다시 사서 작은 화분에 제대로 키워봐야겠다. 혹시라도 잘 커서 바질 페스토 한 번 만들고 나면 로즈마리도 키우고 민트도 키우고 적상추랑 깻잎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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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여행을 다녀왔다. 이건 다시 포스팅 하겠지만...사진 정리랑 포스팅에 대한 열정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겠으므로...일단 간략한 소감만 언급하려고 한다.
좋았던 건 어쨌든 낮은 한옥 건물들이 이국적이라 좋았다. 시야도 편안하고 평화로웠다. 골목을 돌면 아무렇지도 않게 능 하나가 자리잡고 있는 것도 좋았고. 최부자댁에 가서 대가 끊긴 최부자댁 마지막 자손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석굴암은 올라가는 길도 산길이라 휴양림 온 것처럼 좋았고 불국사는 입구에 있는 꽃나무와 떨어진 꽃잎 덕분에 풍경이 예술이었고 인생샷도 찍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하지만...단점이 더 많았지...
사실 우리가 있는 동안 날씨가 좋지 않았다. 2박 3일 있는 동안 해가 난 거는 첫 날 오후뿐. 나머지는 계속 흐리고 바람이 불어 추웠고 마지막 날에는 비가 내렸다. 또 하나 예상치 못한 변수는 아이들의 수학여행 기간이었다는 거. 안압지와 첨성대와 석굴암에서 마주한 그들은 정말 존재감이 너무 대단했다. 목청의 힘을 남김없이 써가며 '아기 상어 뚜루뚜르뚜르' 떼창을 부르는데 경주가 떠내려가는 듯 했다. 또 내 여행을 만족스럽지 못하게 만든 것은 밥집들. 조미료 맛으로 초벌한 고기는 좋은 고기도 아닌 거 같은데 양도 적었고 주변에는 또 온갖 조미료로 버무린 밑반찬들이 깔렸다. 경주에서 제일 맛있게 먹은 건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먹은 그 피자집의 피자와 맘스터치의 싸이버거였다. 마지막은 찰보리빵. 그놈의 찰보리빵 ㅋㅋㅋㅋㅋ 내가 묵은 숙소가 대릉원과 황리단길에서 가까운, 관광객들이 많은 곳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아무튼 가만히 서있으면 시야에 찰보리빵 가게가 적어도 5개는 들어왔다. 그럼에도 마지막날 한 상자 사가지고 오긴 했지만...대릉원 앞 쌈밥집에서 큰 소리로 들려오는 가요도 정말 공해였다.
여행 뒤 chan과 얘기했는데 chan 도 사실 생각보다 별로였다고 하더라. 내가 구구절절 얘기했지만 사실 우리는 관광지 냄새가 나는 곳을 무척 싫어한다. 그거 하나만 과해도 우리에겐 별로 다시 찾고싶지 않은 곳이 된다. 덕분에 우리가 다시 국내 여행을 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여행을 다녀왔는데...제대로된 여행을 다시 가고싶게 만드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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