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20150206, but then do something



작년부터 '아웃사이더'라는 책을 읽고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이 책에는 여러 개의 문학 작품과에서 찾을 수 있는 '아웃사이더'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웃사이더'란 시대상에 따라 미묘하게 바뀌고 작가마다 조금씩 다르게 표현된다. 심지어 같은 작가라도 초기 작품과 말기 작품에서 '아웃사이더'에 대한 그의 시선은 또 바뀌어 있기도 하고. 그렇다. 이렇게 다양하게 표현되어온 '아웃사이더'들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분석하고 설명한다. 그 중 거의 제일 처음으로 나오는 '아웃사이더'들의 공통된 특징은 바로 '비현실성'이다. 아웃사이더에서는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의 주인공이 세상에 그렇게 무관심했던 것은 바로 '비현실성'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그냥 그렇구나 이런 관점으로 보니 새롭네 이 사람 정말 똑똑하잖아? 하고 지나갔었는데 어느 날 문득 나는 그 책에 아웃사이더의 예로 나오는 수많은 다른 책의 주인공들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현실 세계를 훨씬 더 비현실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닳았다. 그러니까 어느 날 작업 중인 chan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그래 쟤가 내 남편이지..?' 하는 생각이 든 순간. 생각해보면 계속 나는 내가 '결혼'을 했다거나, chan이 나의 '남편'이라거나, 내가 2000년도에 살고 있다거나(이건 그래도 2~3년 전부터 좀 나아졌다.), 등등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정의되는 단어?에 대해서는 사회적 의미가 담긴 단어보다 그나마 조금 더 실감을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chan을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것 보다 그냥 '동반자'라고 생각하면 이질감이 없어지긴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회 시스템과 관련되고 사회적 동의가 필요한 단어에 대해서는 실감을 잘 못 느끼는 것 같다. '비현실성'이 내 정체성의 한 조각인 것을 확실히 인지한 것이다. 


20대 초반정도까지는 나 자신에 대한 이러한 발견을 하면 그 나름대로 흡족했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이 일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내가 그 마음이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라고 되뇌이고 생각해보는 것이 좋았고 습관이었다. 그냥 그 자체로 만족스러웠다. 근데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정말 내 머리를 세게 때리는 것 같은 드라마 대사가 있었다. 바로 길모어 걸스에 나오는 대사다. 로리가 칠튼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학생 대표로 나와서 한 연설 중 한 대목이었다.


"Apply yourself. Get all education you can but then do something. Don't just stand there. Make it happen. Lee Iacocca" 


여기서 가장 나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but then do something' 이었다. 그간 자기만족으로 일관하며 살아왔던 내 삶의 태도에 정통으로 한 방 맞은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기만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도 굉장히 어려우며 그걸 찾고 열심히 하면서 내가 좋으면 그만! 내가 이런 태도로 삶을 살고 있었다는 걸 이 대사를 듣고 깨닳았다. 그래서 넌 세상에 뭘 기여할 수 있는데? 뭘 할 수 있는데? 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지는 거였다. 부끄러웠다. 뭔가 되게 이기적이고 나만알고 마냥 어린애처럼 세상에 뭔가를 바라기만 하고 세상이 나에게 뭔가를 주는 것이 당연한 줄 알면서 살고 있었으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잘난척이나 해왔던 것 같아서 갑자기 존나 쪽팔려졌다. 그 후로 계속 생각해봤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니가 할 수 있는게 뭔데?' 딱히 없었다. 조금씩 생각이 발전을 한 것 같긴한데 여전히 명확한 답은 찾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이 구절은 몇 년간 시도때도 없이 종종 떠오른다. 그래서 그 후로는 '아웃사이더를 읽고 나니 '비현실성'이라는 게 내 정체성의 한 조각이라는 걸 알게됐어!' 라는 발견을하고난 뒤의 희열 뒤로 곧장 '그래서? 그걸 가지고 뭘 할 수 있는데?' 라는 질문이 뒤따르고 바로 시무룩해진다.


그런데 또 요즘 읽고 있는 책인 알랭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에서는 자기 정체성의 한 조각을 깨닫고 확인하는 것은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고 고귀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약간의 위로가 된다.


그래서?

but then do something!


다시 한 번 반복. 

결국 나를 질책하는 듯한 저 구절이 이긴다.